[기사][국민일보] [방에 나를 가뒀다, 은둔 청년 보고서] ① 집 밖이 무서웠던 청년, 어머니 유언에 신발을 신었다 (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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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도망친 19년… 매맞던 아이, 36세 은둔 청년 됐다 [이슈&탐사]

[방에 나를 가뒀다, 은둔 청년 보고서] ① 집 밖이 무서웠던 청년, 어머니 유언에 신발을 신었다


청년이 고통받는 시대, 더욱 한계 상황에 놓인 청년들이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로 불리는, 스스로를 방에 가둔 청년들입니다. 가족이 쉬쉬하지만 ‘은둔 청년’은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일본의 히키코모리처럼 사회 문제가 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집에 고립되는 청년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일보 취재팀은 은둔 청년 사례 18건을 찾아 당사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방 안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6회 시리즈로 전합니다.



지난 16일 한호영(가명)씨가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K2인터내셔널코리아에 입소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윤성호 기자


1985년생 한호영(가명)씨의 시간은 방 안에 숨어든 19년 전에 멈춰 있다. 세상은 그가 서른여섯 살이라고 하지만 그는 세상 밖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부터 집 안 공간이 호영씨가 디딜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는 ‘은둔형 외톨이’로 19년을 보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심리치료를 위해 외출했지만 세상과 마주 서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려 노력하고 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서다.


폭력 피해자


호영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얼굴로 날아들던 노란 알갱이들을 기억한다. 딱딱하고 짭조름한 옥수수과자 ‘밭두렁’. 그를 괴롭히던 무리 중 한 명은 밭두렁 알갱이를 입 안에 장전했다. 침이 흥건한 밭두렁 총알은 산탄총마냥 호영씨의 얼굴을 때렸다. 얼굴은 일그러졌고 저격수는 웃었다. 호영씨는 지난 16일을 비롯한 세 차례 국민일보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워낙 왜소하고 마르고 내성적이다 보니 괴롭힘이 늘 있어 왔어요. 고등학생 될 때까지…”라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일진’이 됐다. 호영씨는 그의 괴롭힘 대상으로 강등됐다. 그는 학교에서 호영씨를 발로 걷어찼다. 한가득 입에 물고 씹던 초코파이를 호영씨 얼굴에 뱉은 뒤 낄낄거렸다. 폭력은 공기처럼 스며든 일상이었다. 20년이 흘러도 친구의 이름은 호영씨 머릿속에 또렷이 남았다.


호영씨는 보복이 두려워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고통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는 사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이 뿌리내렸다. ‘사회공포증’ 진단이 내려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불안을 경험한 뒤 다양한 상황을 회피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기능이 저하되는 정신과적 질환이다.


특히 학교는 지옥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방에 숨어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불같이 화를 낼 아버지가 떠올라서였다. “도피처가 없었어요. 집에선 아버지한테 당하고 학교에선 괴롭힘을 당하니까. 등교 거부를 하면 아버지한테 맞을까봐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억지로 다녔어요.”


집 밖에선 친구들이 그를 괴롭혔고 집 안에서는 아버지가 그랬다. 호영씨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화를 내거나’ ‘화를 내며 때리거나’ 두 가지였다. 성당에 가지 않으려 해도,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도 맞았다. 동네 친구와 싸운 뒤 집에 와 울면서 밥을 먹지 않을 땐 발로 걷어차였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든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당신이 애를 잘못 키워서 저런 거 아니냐”고 화를 냈다. 호영씨는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호영씨가 뻗은 주먹은 대부분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허우적대던 그의 주먹은 아버지 마음을 엄청난 힘으로 가격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충격이 크셨던 거 같아요. 그 후로 아버지도 성당에 안 다니게 되셨대요. 회의감이 생기셨던 거죠.”


아버지의 폭력은 점차 줄었다. 고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제안으로 가족은 단체 심리치료를 받았다. 심리치료사는 가정 내 아버지의 문제를 짚었고, 아버지는 말없이 들었다. 호영씨는 심리치료로 조금 용기가 생겼다. 아버지가 싫어할 일이지만 본인은 가장 하고 싶던 일, 등교 거부를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그래도 두렵더라고요. 맞지 않을까. 개학식 전날 새벽에 제가 미친 척 연기를 했어요. 안방에 들어가서 혼자 중얼거렸어요. 아버지가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계속 중얼거리다가 방에 들어갔어요.” 은둔형 외톨이의 삶이 시작됐다.


고립 19년


방 안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인터넷 공간을 떠돌았다. 잠을 잤다. 생활이 불규칙해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밤낮 변화에도 둔감해졌다. 끼니는 거의 굶다시피 했다. 어머니가 호영씨가 좋아하는 바나나우유, 곱창전골을 사오면 그때는 조금 먹었다.


호영씨에게 방 안에 은둔했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그는 “행복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방은 그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할 일이 없었다. 갇힌 삶 그 자체가 아버지를 향한 반항의 표시였다. “한동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콘솔게임을 하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제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는 게 행복했어요.”


은둔생활이 치유의 시간이 될 줄 알았지만 모두에게 상처가 됐다. 호영씨는 9개월간 집 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썼다. 게임 좀 줄이라는 말에 아버지가 입고 있던 러닝셔츠를 찢어버리고 방에 들어갔다. 언쟁을 하다 아버지 뺨을 때린 적도 있다. “해선 안 될 행동을 했죠.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은둔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했던 그였지만 사실은 외로움도 컸다고 했다. 피규어 수집하는 걸 좋아해 오프라인에서 사람들과 만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뒤처져 있고 직업도 없잖아요. 남들이 날 안 좋게 보진 않을까, 비웃진 않을까, 조롱하진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20대 중반에는 뒤늦게 검정고시를 쳐야겠다고 다짐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하지만 꿈에 대한 열망보다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결국 수능을 보지 않았고 대학 진학도 할 수 없었다. 호영씨는 다시 방 안에 주저앉았다.


카톡 유언


지난 9월 어느 날, 집에 온 누나가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묻자 누나는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했다. 어머니는 올해 63세, 아버지는 69세다. 호영씨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암… 맞아요?” “(…) 그래.”


지난 16일 은둔형 외톨이 청년 재활시설인 서울 성북구 K2 인터내셔널 코리아에 '은둔형 외톨이'라는 제목의 책이 놓여있다. 윤성호 기자


어머니가 입원한 서울 서대문구의 한 대학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집에서 약 30분 거리였다. 한달음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모래주머니처럼 호영씨 걸음에 무겁게 매달렸다. 힘들게 도착한 병원에서 그는 어머니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땅만 쳐다봤다. 의사는 어머니의 암이 상당히 진행돼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호영씨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가 걸렸다는 암 이름을 검색했다. ‘5년 생존율 15~28%’. 오랫동안 안온함을 느꼈던 방에서 그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에게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집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한 어머니는 호영씨가 운동화를 신고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서로 느끼고 있었다.


지난 10월 5일 오전 9시40분. 입원 중인 어머니가 그에게 긴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소원은 아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 모든 것 네 의지로 극복해야지. 용기내서 마음먹고 하면 뭐든 잘하잖아. 믿는다. 엄마 유언이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들과 만났지만 만남은 이별이 있지. 우리 인생 누구나 다 그래. 일찍 가고 늦게 간다는 것뿐이야. 어떤 경우든 감사하고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살기를 하늘에서도 엄마가 기도하며 빌어줄게~. 사랑하는 아들 안녕~.’


호영씨는 은둔생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찾은 곳은 K2인터내셔널코리아(K2)였다.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의 재활을 돕는 사회적기업이다. 기숙형 프로그램에 입소한다고 전하자 어머니는 ‘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보다 호영씨가 K2에 가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19년 만에 나온 세상은 아직 익숙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긴장의 연속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건너편 사람과 눈이 마주칠까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직 두려움이 크지만 호영씨는 ‘남들처럼 살 수 있게 되는 날’을 꿈꾼다고 했다. “돈을 벌어 원하는 음식도 내 돈으로 사먹고, 취미생활도 내 돈으로 하고 싶어요.” 그가 수줍게 말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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